IMF 외환위기 여파로 실직 후, 구직 활동도 뒤로 한 채 헌책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년 남성 서민기. 카메라는 그 뒤로 낡은 간판과 좁은 문, 통로만 빼놓고 이중 삼중으로 빼곡하게 책을 꽂거나 쌓아 놓은 공간을 비춥니다. 이윽고, 연애 소설을 읽다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중년 남성.
최민식이 연기한 이 장면은 90년대 후반 고용불안으로 인한 혹독한 시기를 거쳐온 대한민국 남성 가장들의 섬세한 내면을 대변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해피엔드’ 속에 등장한 헌책방 신입니다.
‘헌책들이 가득한 방’이라는 단어가 주는 낡은 이미지는, 사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도회적인 쇼핑과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은 틈새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취할 줄 아는 똑똑한 ‘쇼퍼’들에게 헌책방은 혜택을 가로챌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청계천에 면한, ‘서 (책) 적’이라는 간판이 인상적인 숭인동의 어느 헌책방. 책장이라는 가구의 기능이 상실된 것 같은, 폐지와 책의 경계마저 모호해 보이는 내부 경관이 청결하진 않지만 아름답습니다. 겹겹이 쌓인 책들을 시간 들여 탐색하다 보면, 전혀 생각지 못한 보물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1990년대, 해외에서 발간한 ‘영문 프라도 미술관 올 컬러 화집’ 가격이 불과 만 원이 되지 않습니다.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공식 발간한 ‘Museo Nacional del Prado’ 가이드 북조차 6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판매되고 있는데 말이죠.
한쪽에선 어느 구매자가 한문 제목으로 쓰인 ‘한국문학전집’ 한 질의 가격을 주인과 흥정하고 있습니다. ‘가격을 떠나 저 책들을 다 들고 갈 수는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수고조차 고려할 대상이 아닌 정도의 가치가 있는 책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절판 본을 찾아낸 것일지도.
한편, 대형서점의 프랜차이즈 중고서점들의 경우 헌책방들보다는 비교적 쾌적한 환경에서 쇼핑을 즐길 수 있습니다. 전국의 주요한 역세권에 펼쳐져 있는 이러한 중고서점들의 경우 목적 없이 들어갔다가도 보통 빈손으로 나오기가 힘들어집니다.
‘책의 가치’를 두고 고민할 여지가 없는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마저도 50% 이하의 가격에 살 수 있으니까요. 잭 캐루악의 ‘길 위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 유명한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오렌지’과 같은 책들에 반값도 안 되는 가격이 붙은 판매라벨을 보면 하루 종일 라벨의 숫자가 머릿속에 뒹굴 거 같아 결국 쇼핑백에 담아들고 나오게 됩니다.
이미 서점에서 팔고 있는 책을 중고로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것보다 중요한 헌책방의 가치는 ‘판매가 중지돼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책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중성이 낮은 학술 서적이나 절판된 지 오래된 특정 출판사의 문학적 가치가 있는 책들, 잡지 과월호 등은 헌책방이 아니면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국문학 애호가가 서울 청계천 책방 골목에서 1930년대 출간된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의 초기 본을 발견하거나, 잡지 애호가가 2001년 발행된 ‘GQ 코리아’의 창간호를 발견한다면. 혹은 부산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1991년 폐간한 ‘선데이 서울’의 마지막 호를 발견했다면 그보다 큰 기쁨이 있을까요? |